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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cisbeo

*주의: 사건의 전개를 위해 임의로 사건이 벌어진 시간대 등의 조정이 있습니다. 허구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수없이 드나든 저택의 복도는 계절이나 유행이 바뀔 때면 대번에 낯설어지게 바뀌고는 했다. 아니나 다를까, 겨울이 다가온 저택의 복도에는 못 보던 기물들이 늘어나 있었다. 추위가 들이치지 않게 두터운 벨벳으로 된 태피스트리를 내린 창문, 너른 복도 위를 장식하고 있는 계절과 맞지 않는 꽃들, 값비싼 도자기와 두터운 카펫이 자리했다. 어딜 보아도 눈에 거슬림 없는 장식들은 은근하게 제가 얼마나 가치 있는 물건인지 피력하는 양 놓여 있었다.

집안을 계절과 유행에 맞게 꾸며두는 것이야말로 안주인의 안목과 가문의 부유함을 보여주는 가장 쉬운 일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이 저택은 그야말로 이상적인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꽤 낯설게 바뀐, 그러나 수없이 드나들었던 저택의 복도 위를 남자는 느긋하게 거닐었다. 몇 대에 걸쳐 내려온 저택이다. 족히 수백 년은 지난 연식이 무색하게, 한기가 감돌지 않는 실내는 말 그대로 사치와 과시 그 자체였다. 남자는 삐딱한 웃음을 내걸었다.

그는 이 복도와 처지가 비슷했다. 리카르도 소르디는 시뇨라 두칼레가 수많은 값을 치르고 정성스레 꾸며둔 복도처럼, 모두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 그 자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도덕하다는 암묵적인 시선까지 받아 가며, 이제는 사장되어 가는 케케묵은 제도를 끌어와 자신을 치치스베오로 삼았을 리 없었으니…….

물론 귀부인들의 자유로운 거취를 위해 치치스베오를 두는 일은 반세기 전 대단히 유행했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사교계의 누구도 그것을 부적절하다는 발언으로 절하하지 못하였으나, 교회의 권위가 세워진 뒤 그것은 단숨에 적절치 못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제 와서는 사라지고 있는 제도라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여인들이 남자 없이 어디도 가지 못하게 발을 묶어놔 놓고, 거취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수단을 만드니 이제는 그것을 부정하다고 보는 것이다. 정말 우습기 그지없게도.

어쨌거나 시뇨라 두칼레에게는 사교계의 꼭대기에서, 철 지난 제도마저 선망하게 만드는 권력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은 편입되지 못할지언정, 자식만큼은 사교계에 녹아들게 하고 싶었던 제 아비, 지오바니 소르디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었다.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그녀는 자유로운 거취와 괜찮은 트로피를 얻었고, 지오바니 소르디의 아들은 사장되어 가는 케케묵은 제도 밑에서 작위를 산 사내의 아들이되, 드높은 권력을 가진 여인의 치치스베오로 사교계의 이방인에서 벗어났으니….

 

그것이 끔찍한 것은 오로지 그 자신 뿐이었다.

 

그 사이에 리카르도는 마호가니와 상아로 장식된 문 앞에 도착했다. 안주인의 방이었다. 남자의 옆에서 걷던 발렛은 재빨리 노크하고, 들어가도 될지 허락을 구했다. 다소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던 문 너머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그리고 자세히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한 소리가 넘어왔다.

“들어오렴.”

로마식 만들어진 긴 의자 위로 늘어지듯 않은 시뇨라 두칼레는 함께 앉은 귀부인들의 두꺼워진 드레스와 다르게 바깥 날씨엔 전혀 영향받지 않는 듯, 얇은 모슬린을 두어 번 겹쳐 만든 드레스 위로 아마실과 금사로 짠 레이스 숄을 두른 차림새였다.

“릭. 조금 일찍 왔구나.”

시뇨라 두칼레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혼자가 아닌 여자와 정각을 가리키는 시계를 번갈아 본 남자는 그저 부드럽고, 길게 웃었었다. 그는 시간을 착각한 적이 없다. 예정에 없던 티타임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엔 수가 많았다. 그리고, 정말로 이 작은 티타임에 자신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면 시간을 정정했을 사람이다.

그래서 리카르도는 일찍 왔다는 시뇨라 두칼레의 말을 정정하는 것 대신, 가볍게 올린 시뇨라 두칼레의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그녀가 바란 의도대로.

“시뇨라를 기다리는 것은 제 기쁨이니까요……. 다만 숙녀분들의 시간을 방해하게 된 것 같은데….”

나갈까요? 라는 물음 대신 뒤끝을 흐리는 말에 시뇨라 두칼레의 눈치를 보던 귀부인 하나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결국 자리에 앉은 리카르도를 향해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하녀에게 같은 찻잔을 하나 더 내오게 시킨 시뇨라 두칼레는 사람 하나가 더 앉은 일 따윈 없다는 듯 굴었다.

귀부인들의 이야기의 주제는 대체로 비슷했다. 유행하는 보석과 드레스, 종종 남편과 자식들의 이야기나 살롱 운영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가장 열띤 이야깃거리는 사교계의 가십거리였다. 알고 있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떠도는 소문과 다른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그동안 시뇨라 두칼레는 종종 리카르도에게 시선을 던지고는 했으나 그것은 눈치를 보는 것과는 달랐다. 그보단 관찰하는 시선에 더 가까웠다. 리카르도는 그녀가 사교계에서 반쯤은 키워낸 사람이었으니 그 짧은 시간 속에서도 태도의 결함이 있는지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이다. 정말 달갑지 않은 지루한 시간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물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영지 내에서 최근 크리처들이 출몰하는 빈도가 잦아진다는 소리에 문득 불안한 시선을 내비쳤다.

“끔찍한 일이에요. 그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거잖아요.”

“저번엔 날아다니는 것까지 발견했다고…, 대체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크리쳐, 이 세상의 동물이 아닌 것들을 세간은 그렇게 불렀다. 처음엔 작은 것 몇 마리였다. 그때만 해도 영지 내의 군사로 힘들게나마 치워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출몰하는 크리쳐들의 수는 늘어나고, 또 늘어나고, 크기는 거대해졌다. 심지어 날아다니는 것까지 나타났다는 소식이 실린 신문은 수없이 팔려나가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했다. 작은 영지 하나가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크리쳐 때문에 망해버렸다는 소식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었으니, 이제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와중에 황제는 그 흔한 토벌전 하나 없이 수년째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안 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그러나 가시지 않는 불안감은 어떤 균열을 가져올지언정, 중앙 사교계의 정점인 수도에선 여전히 삼삼오오 모인 곳에서의 가십거리에 불과했다. 오늘 이 작은 티파티에서의 수많은 이야깃거리 중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

 

반드시 부부가 함께 참석해야 하는 곳이 아니라면 시뇨라 두칼레의 남편은 부인과 동행하지 않았다. 그는 부인 없이 자유로이 오갈 권리가 있었으나, 시뇨라 두칼레는 아니었다. 그 사실에 크나큰 불만을 품고 있는 시뇨라 두칼레는 처음에는 분노했고, 어느 순간 체념했다. 이제는 남편의 무관심에 지친 여자는 자신이 트로피로 내세운 자신의 치치스베오에게 이럭저럭 만족했다.

그녀는 황제가 기꺼이 친필로 초대한 무도회에 참석해야 하는 오늘조차 자신을 에스코트할 치치스베오을 불러내야 했다. 리카르도는 때때로 그런 그녀의 처지를 동정했다. 그럴 처지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서야 무도회의 준비를 위해 사람들을 물린 시뇨라 두칼레는 미리 골라둔 벨벳 드레스를 꺼내 왔다. 방 안에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얇은 흰 천으로 된 가림막을 쳐놓은 채였다. 천 너머로 옷시중을 받는 여자의 실루엣이 비쳐 보였으나, 리카르도는 별다른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그는 다만 여자의 진한 네이비색 벨벳 드레스와 어떤 장신구가 어울릴 것인지를 고민했다.

“머리를 올리실 건가요~?”

천 너머로 별다른 대답이 넘어오지 않았다. 알아서 고르라는 것인지…. 그는 대답을 가다리다가, 그냥 어깨와 팔이 훤히 드러나는 디자인에 맞는 것을 고르기로 했다.

리카르도는 값비싼 패물들 사이에서, 여자의 긴 목을 가려줄 수 있는 세줄짜리 진주로 된 초커 형태의 목걸이를 골랐다. 가운데엔 엄지손가락만 한 사파이어가 함께 장식된 귀물이었다. 허전한 어깨 위엔 어차피 흰여우 모피를 덮을 테니 괜찮은 선택이 되리라. 그에 맞춰 귀걸이를 골라내려던 찰나에, 시뇨라 두칼레는 천 너머에서 조용한 손짓으로 사용인들을 물렸다. 그녀는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신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예카테리나가 움직이기 시작했어. 거대한 전쟁이 나겠지……. 네 아비에게 전해주렴.”

지오바니 소르디는 크리쳐가 나타나고, 수많은 무기를 팔아 거대한 부를 축적한 남자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 삼아 음지에서 양지로 나아왔다. 대놓고 말하는 것을 보니, 정말로 전쟁이 나긴 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지요….”

“그리고, 릭. 충고해 주는데. 네가 네 부친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만…. 이번엔 네가 참으렴. 입대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 이번은 안돼.”

“시뇨라, 저는 입대하겠다는 소리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걸요…….”

리카르도는 짐짓 억울한 듯한 소리를 내었으나 이제 서른의 막바지에 다다른 여자는 그 말을 딱히 신뢰하지 않는 듯,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들은 인간이 상대할 것이 못 돼. 그걸 상대하려면 스스로 괴물이 되는 수밖엔 없을 텐데.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지. 반발해 보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만, 이번엔 너무 위험해.”

그녀는 이제 아예 가림막 바깥으로 나와 다시 긴 의자에 걸터앉았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그러나 완연한 젊음이 아닌 것은 티 나는 얼굴은 수심이 깊어진 채였다.

“그냥 네 부친이 바라는 대로 내 사촌 조카와 혼인해. 나쁘지 않잖니. 그 애는 아주 대단한 신분까진 아니지만 퍽 예쁘장하고 순종적이니 좋은 아내가 될 거다. 네게 작지만, 풍요로운 영지 하나쯤 안겨줄 수 있지. 그렇게 살을 부대끼다 보면 네 아이가 생길 거고, 그 작은 아이를 키우다 보면 네 아비를 이해하는 날이 올테지…. 산다는 건 그런거란다. 사람은 언제나 선할 수 없어. 어느 순간 이기적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지.”

이마저도 잔소리 같겠다만.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리카르도가 골라내둔 목걸이를 하녀나 그의 손을 빌리는 대신 직접 착용했다. 한쪽에 놓아둔 흰여우 모피를 두르고서야 머리를 만질 사람을 불러낸 여자는 끝까지 강조했다.

“내 말을 기억해. 이번엔 안돼. 반발심 따위로 덤벼들기엔 너무 큰 판이 될 테니까.”

그녀는 양치기 왕자가 나라를 망하게 할 거라고 예언했던 어떤 예언가처럼 말했다. 그는 대답 대신 시뇨라 두칼레에게 실크로 된 긴 장갑을 내밀었다.

 

*

 

순조로울 것 같았던 파티는 예상치 못한 이유로 지체되었다. 한참 전에 시작되어야 했을 파티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황제를 기다리느냐 아직 제대로된 개막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춤 신청을 거절하고, 한 구석에서 샴페인이나 홀짝이던 남자는 종종 멀찍이서 보곤 했던 황제를 떠올렸다. 시뇨라 두칼레와는 제법 막역한 사이라던 여자는 빙제, 그런 별칭으로 불렸다.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다는 여자는 짐짓 평범해 보였으나, 그 형형한 눈빛만큼은 범인의 것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리카르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서는 이제 홀 내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기다리게 했다면 제아무리 황제라 한들, 아프다는 소식 정도는 예의상 들려주어야 마땅했다. 더 늦으면 콧대 높은 귀족들의 불만들을 잠재우기 힘들 텐데도, 황제는 여전히 머리카락 한 올 비추지 않았다.

그는 잠시 자신과 떨어져 다른 귀부인들과 한담을 나누고 있는 시뇨라 두칼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 역시 아는 바가 없는 듯, 초조하게 황제가 나올 문 쪽을 보고 있었다.

“시뇨라….”

이만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묻기 위해 가까이 가던 순간이었다. 황제가 들어서야 할 문이 열렸고, 한순간에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기다리던 황제가 아닌 황제의 급사였다. 그는 몹시도 다급하게, 말을 고를 틈도 없이 비명처럼 외쳤다.

“훙서! 폐하께서 훙서하셨습니다!”

급사는 황제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세 발의 총알을 이마에 맞은 황제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그 끔찍한 소식에 그녀와 친분이 있던 시뇨라 두칼레는 그 자리에서 휘청였다.

“아, 맙소사……. 그가 결국 돌아섰구나…. 전쟁이……. 예카테리나가 한 말이 진실이었어….”

리카르도는 얼른 쓰러질 것처럼 구는 시뇨라 두칼레를 부축했다. 그녀는 한참을 탄식하다가 미친 사람처럼 미카엘까지 돌아섰다며 통곡했다.

황제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은 순식간에 홀 전제로 번졌다. 덕분에 시뇨라 두칼레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는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있는 리카르도만이 들었다.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시뇨라 두칼레를 보며, 어지간히 충격이 큰 모양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순간이었다.

“릭, 약속해. 절대…, 절대 전쟁에 나서서는 안 돼. 어떤 일이 있어도….”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매끄러운 실크 장갑을 낀 여자의 손이 그의 팔 한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안색을 한 여자를 거의 안다시피 하여 2층에 있는 휴게실로 이끌어 간 리카르도는 간단하게 마실 것과 그녀가 놓쳤던 숄을 들고 왔다. 아래는 아비규환이다. 두칼레와 데스테, 두 가문의 여자들에게 할당된 휴게실은 다행스럽게도 한적했다.

“시뇨라. 하인에게 마차를 준비시키라 했으니, 준비가 될 때까진 여기서 좀 쉬는 게 좋겠습니다….”

당장 돌아가야 한다고 할 줄 알았던 그녀는 휴게실에 비치된 의자에 길게 걸터앉은 채로 고개만 까닥였다. 막역한 친구를 잃은 소식 때문인지, 한참동안 눈물을 흘려댔다. 차게 식은 손을 주무르는 손에 시선을 둔 채로 색 색 숨을 쉬는 것이 고작이었던 여자는 리카르도에게 무언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 네가 더 알게 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겠지-….”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침읍하듯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지켰다. 한참 뒤에야 다른 이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게 잠가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리카르도는 마부를 부르러 간 하인이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작은 주인님. 만프레디입니다.”

돈 만프레디는 부친의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부친이 곁에 둔 보좌관이라, 제 부친의 곁을 비우는 일이 드문 사람인데…. 무어라 답할 겨를도 없이 만프레디는 어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저택이 무너졌어요! 크리쳐가 쏟아져 나온 통에 손쓸 겨를도 없이요! 주인님과 마님이……. 동생분들도 그 안에서….”

그 말을 들은 뒤로 리카르도는 잠긴 문을 거의 뜯어 내다시피 열었다. 어서 돌아가야 한다고 소리치는 만프레디와 자신은 괜찮으니 어서 가라며 등 떠미는 시뇨라 두칼레의 목소리가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리카르도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시뇨라 두칼레가 탄식했다.

“빙제에게 무기를 댄 자조차 용서할 수가 없었던가…….”

그녀는 조용히 문을 잠갔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여자는 자신이 퍽 마음에 들어 했던 녹색 눈의 남자가 더 많은 것을 파고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기에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청년에겐 너무 가혹한 진실일 테니. 그녀는 신께 기도했다.

제발 인간이 승리하기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기를…….

 

*

 

시뇨라 두칼레의 언급대로, 황제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졌다. 그간 보아왔던 크리쳐 따위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재앙 같은 존재가 나타난 전쟁은 수없이 많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세상 모든 인간을 소멸시킬 것 같았던 그것 앞에서 인간은 지극히 무력했다. 최후의 최후, 인간이 아니게 된 몸이 된 이들 중에서 끔찍한 전쟁을 종결시킬 영웅이 탄생하기 전까지 세상은 비탄에 빠졌다. 거짓말처럼 한 줌 재가 된, 후일 10단계라고 명명된 존재가 사라지고서야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여전히 크리쳐들은 득실거렸고, 인간들은 크리쳐들에게 일부의 땅을 내어준 채 스스로 안전한 땅인 ‘숨’ 안에 갇혀 생존하길 택했다. 그제야 조각난 평화가 세상에 찾아왔다.

평화를 되찾은 지 십여 년 뒤, 거대한 전쟁이 다시 벌어졌다. 이번엔 인간의 오만과 탐욕 탓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인간들은 빼앗겨 나가지 못하게 된 땅을 되찾고자 했다. 불안정해진 숨이 열린 틈으로 말 그대로 크리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역시 수많은 죽음이 있었으나, 이미 첫 번째 전쟁을 겪은 인간은 두 번째는 보다 빠르게 승리했다. 다시금 하늘이 닫히고, 이번에도 세상은 영웅들과 안전을 얻었다.

 

*

 

사치스럽게 불을 밝힌 무도회장 아래에서 춤을 추다 지쳐 삼삼오오 핑거 푸드 혹은 샴페인 잔을 든 채 파티장 한켠에 모인 사람들의 관심사는 이번 전쟁의 영웅들이었다. 누군가는 영웅을 선망하는가 하면, 혹자는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된 이들을 혐오했다. 목소리가 큰 남자는 마치 이 파티가 승전한 영웅들을 치하하기 위한 자리라는 것은 잊은 것처럼 소리쳤다.

“늙지도! 쉽게 죽지도 않게 된 몸 아닌가! 쓸모를 다했으면 폐기해야지! 너무 위험해, 그들이 배신할 마음이라도 먹으면 그걸 어찌 막을 거냔 말이야.”

도무지 이 자리에서는 적절치 않은 말이라, 주변에서 대번에 입을 막아섰다.

“입 좀 조심하게. 술을 과하게 한 것도 아니면서…. 그들이 여기 와있는 걸 잊었나?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은 조심을 좀 해 이 사람아.”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신 뒤에야 나타난 혐오는 익숙한 것이라, 그보다 조금 떨어진 테라스 쪽 벽에 나란히 등을 기댄 남자 셋은 킬킬거렸다.

“어떻게 생각해?”

“어쩔거야~. 꼬우면 지들도 전쟁에 나갔어야지~. 전쟁이 또 난다고 해도 여기서 이러고 있을 텐데…. 그래서야 강화 신체를 받긴 글러 먹었지.”

두 번의 거대한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기부금을 내는 것이 전부였던 이들이다. 죽어 나간 것은 힘없는 이들이지. 리카르도의 말대로 여기 있는 인물의 태반, 아니 거의 전부는 전쟁 중에도 참전은커녕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던 이들이다. 귀족 중의 귀족들, 하늘이 닫히고 인간들의 생활이 숨에 갇히고서도 그들은 이전의 특권을 누려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따라서인지 알 수 없으나, 참전했던 이들이 있긴 했다. 말 그대로 소수였지만. 최가에서 1차 전쟁에 참전한 이들이 있었으나, 양아들과 양딸이었다. 2차 전쟁에 참가한 이들 중에선 리카르도가 있기는 했다. 그마저도 그는 부친의 편법으로 귀족이 되었고, 심지어는 부친의 사망 이후로 작위를 세습 받지 않았다. 더군다나 리카르도의 입대는 사사로운 복수심을 기반한 것이라, 그는 친우들에게도 자신이 저 겁쟁이들 틈에 있었던 자라고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최아미와 최윤, 그 둘이 전부라고 보는 게 옳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 생존 앞에서 바보 같은 소리라고 외쳤던 겁쟁이들이 이 자리에 사치스러운 옷차림으로 참석해 있었다.

“그냥 돈 많은 겁쟁이들이지…….”

리카르도는 오랜만에 마주한 인간의 추악한 탐욕에 같잖다는 듯 코웃음쳤다. 그는 그들을 잘 알았다.

그들은 부러워하는 것이다. 크리쳐를 토벌하기 위해, 혹은 재앙 같은 존재에게 대적하기 위해 강화신체를 받은 자들을. 그들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남자의 욕망은 결국 그것이다.

그들이 늙지도, 쉽게 죽지도 않는다는 것. 인간은 수많은 것을 욕망한다. 부를 탐하고, 아름다움을 탐하고, 권력을 탐하며 종래에 모든 것을 손에 넣으면 불로불사를 염원하듯이. 안전해지고 나니 이제는 자신들이 갖지 못한 것을 손에 넣은 양 보이는 이들 시기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녹안의 남자는 삐딱한 웃음과 함께 손에 든 샴페인 잔을 털어내듯 비웠다. 익숙한 풍경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크라바트를 정갈하게 목에 맨 채로 저 속에 있었다는 것이고, 지금은 정복을 각지게 차려입고 군인 신분의 이방인으로 자리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리카르도는 더 신경쓰지 않고, 스카와 조나단과 함께 벽에 붙은 채로 한담을 이어 나갔다. 이 지겨운 파티가 어서 끝나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 이런 사교계는 그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리카르도는 드물게 자신을 아는 것처럼 구는 이들에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모르는 척했다. 그런 사람이 서넛쯤 지나가자, 스카 오웬은 어떻게 된 일이냐며 그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한둘도 아니고 서넛이 그러니 “눈이 삐었나 보지~.”라는 소리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담배 말리네….’

남자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부친처럼 시가나 파이프 담배가 아닌, 종이에 말린 연초를 피는 것은 그의 몇 없는 낙이었다. 그리고 기어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체 하는 여인을 본 뒤로 리카르도는 빨리 담배를 피우러 나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래서 승전 파티 따위엔 오기 싫었는데…….

“안녕, 릭?”

그의 이름을 부른 여자는 이제 젊지 않았다. 시뇨라 두칼레, 그녀는 두 번의 전쟁 중 속에서도 여전히 사교계의 정점에 근접해 있었다. 여전히 나이대보단 젊어 보이나, 이제는 완연한 노화가 진행된 얼굴을 보고 그는 세월을 실감했다. 거의 십몇 년이 흘렀으니, 이제 그녀의 나이는 쉰이 거의 다 되어갔다. 그는 강화 신체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노화가 멈춘 시기와 나이의 괴리가 적었으나, 그녀의 얼굴 보자 어쩐지 모를 괴리감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아는 자였다. 괴물을 잡으려면 괴물이 되어야 할 텐데, 라고 했으니. 전쟁에 참가하지 말라는 소리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시뇨라….”

이번엔 발뺌하지 못한 리카르도에게 시뇨라 두칼레는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십몇 년이 지난 오늘, 그는 수없이 입을 맞추었던 손등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이제 리카르도는 사교계의 신사가 아니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그를 그때 그 시절처럼 대했다.

“이름을 보고 설마 했는데. 정말 너라니….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충고했는데 말이지.”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는 이제 군인이 된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대답 대신 침묵을 택한 남자는 여전히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이 필요하다는 친우들의 시선은 부러 무시한 채였다.

“하긴, 너는 고집이 셌으니, 끝까지 내 말을 들어주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긴 했지. 그래…, 고생했겠구나. 네 부친의 일은 대단히 유감이야. 그 뒤로 너를 보지 못해 말해주진 못했다만”

그녀는 오랜 기억 속을 더듬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다가, 갓 스물이 되었을 때보다 넓게 벌어진 어깨 위를 치하하듯 두드렸다.

“인간은 인간답게 죽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거늘, 너는 이제 그러지 못할 테니…. 너를 괴물이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상처받지 말거라. 고작 그런 말에 상처받지 말고, 이렇게 되었으니 그 삶에서 너를 찾아야겠지. 오늘은 그냥 즐기렴. 영웅이잖니.”

사교계의 오랜 주연은 한때 자신의 치치스베오였던, 이제는 전쟁영웅이 된 남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시뇨라.”

처세술도, 예절도. 물건이나 그림, 가구를 보는 안목조차도 그녀가 다듬어준 것이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을 받았다는 자각은 있었다.

“여전히 기분 좋게 말하기는. 좋은 술을 따줄 테니 공 치하가 끝나거든 한 번쯤 찾아오렴.”

“안 갈 수 없겠군요. 친우들이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리카르도의 말에 시뇨라 두칼레는 마치 우리?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스카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조나단을 훑어보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렴. 친구도 꼭 저 같은 것들만 사귀어서는.”

그녀는 답지 않게 유쾌한 표정으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저 멀리서 검은 머리의 동양인 남자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며 리카르도에게 눈짓했다.

“저기 난세의 영웅이 나오는 것을 보니 오늘의 파티가 시작될 모양이네.”

어서 가라며 떠미는 손짓에 테라스 한구석에서 파티장 쪽으로 떠밀린 세 남자는 느리게, 그러나 또렷하게 강화 신체를 받은 존재들이 새롭게 몸담을 조직에 관해 설명하는 쪽으로 발을 옮겼다.

첫 번째 전쟁이 끝나고 세상은 그들을 이제 어떻게 쓸 것인가,를 논했다. 두 번째 전쟁이 끝난 뒤에서야 그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곳이 생긴 것이다.

블랙배저, 난세의 영웅에서 새 조직의 총사령관 자리에 앉게 된 남자의 입에서 나온 조직의 이름이었다. 이제 그들은 영웅에서 배저가 될 것이라고, 그리하여 제국의 평화에 다시금 기여할 것이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시뇨라(Signora): Mrs. 또는 madam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 용어. 국내에서 madam은 좋지 않은 용례를 보이는 경우가 있어 해당 표기로 사용하였습니다.

*치치스베오(Cicisbeo): 이탈리아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18세기에 발달했던 관습에 따라 남편이 부재중일 때 귀부인을 따라다니며 모든 활동을 돕는 시종기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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