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ger

실낙원
BGM : Cigarettes After Sex, Don’t Let Me Go (https://youtu.be/lY3g3h0iP3A?si=Td_mBQPPrKuJWcdc)
불야성不夜城의 풍경은 고층에서 내려다볼수록 더욱 눈부시다. 빛을 뿜어내는 간판, 도시의 안전함을 증명하기 위해 각 건물마다 의무적으로 달아놓게 만든 수많은 전등, 쉴 필요 없으므로 멈출 필요도 없는 기계들의 무한한 노동은 아래에선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사치품의 극을 달리게 된 연초를 물며 리카르도는 어둠 한 줌 남지 않은 빛의 거리를 느리게 순찰했다. 근무 중엔 시민 보기에 책잡힐 모든 것이 불가한 만큼, 그리고 비번이기에 실제로도 평복인 그는 일할 때와 다름 없는 시선과 동시에 정반대의 태도를 가지고 한밤을 부유한다. 도시는 빛은 가득하나 적막하다. 대다수 인력을 로봇으로 대체하면서 잉여 시간은 자기 계발에 쏟는 것이 보편적이게 된 시대에, 이제는 열 시가 넘도록 일하는 것이 야만적이라고 비판 받는 작금, 전용 로봇을 최소 한 대 이상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전부 까마득한 빛에 잠겨 숙면을 취하며 생긴 고요였다. 정부의 알량한 융통성으로 불법과 합법 사이에 놓여 있는 가게들, 과거를 재현하는 것 자체를 가치로 내걸어 장사하는 술집, 방랑자만을 받는 저가 숙소, 순찰하는 군경⎯물론 당직자는 그림자처럼 다니는 게 규칙이라 그렇지만⎯들은 소위 사회를 책임지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낮의 사람들처럼 생동감 넘치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들의 소리를 들으려면 직접 뛰어들어야 했다. 어떤 선을 넘어야지만 그들은 자신 또한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데 팽배해 있으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싸움의 한쪽을 담당하는 자들의 긍지 같은 것이었다. 사실 그들은 고위 직업군이자 가장 일선에서 마찰하는 군경을 좋아하지 않고 조직도 마찬가지로 잡아넣기엔 애매하지만 충분히 골머리 앓을 자잘한 사고를 치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랏밥 먹는 사람과 나라의 가장 끝줄에 서 있는 사람은 고릿적부터 소닭 보듯 해왔으므로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목적지에 다다라 남은 담배를 태우고 비벼 끈 후 쓰레기통에 버린 리카르도는 꾸벅 인사해 오는 금일 야간 당직자에게 손 인사로 회답하고는 뒤돌아 가게 문을 열었다. 덜컹, 언제나 한 차례 어긋난 틈에 걸리는 문은 이미 와 있는 손님과 주인장에게 새 손님이 왔다고 알리는 표식이다. 드르륵, 문이 열리면 일제히 시선이 쏟아졌다가 흩어지고 리카르도는 아무렇지 않게 발 들이며 등 뒤로 문을 닫는다. 적막한 거리는 그 찰나에만 살아났다가 다시금 시든다. 전자 시계가 자동으로 열한 시를 알려왔다.
“오늘은 좀 늦었구만?”
“좀 오래 잤습니다······.”
“다음부턴 안 열어줄 줄 알어!”
“문은 제가 열고 들어오는데요~?”
바짝 깎아 잡초를 연상 시키는 흰머리, 오른쪽 눈 위를 크게 가로질러 얼굴 반을 차지하고 있는 흉터, 그러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맑은 파란눈을 가진 주인장은 일본인 모친과 미국인 부친 사이의 혼혈아로 본래는 무기상인 부친 아래에서 한 자리 해먹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모친을 잃는 대신 상처를 얻은 후 이곳으로 넘어와 장사를 시작했다는 범상치 않은 이력이 있었다. 부친의 피를 짙게 물려받아 외양만 봤을 땐 동양인 특유의 신체적 특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데 그리하여 완전히 휘발된 줄로만 알았던 제 정체성 반이 예상 못한 요리 실력에 스며들어 있었단 이야기는, 가게의 단골이라면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은 주인장의 자랑거리였다. 즉, 리카르도는 이 가게의 단골이란 소리였다. 돈 깨나 많은 사람은 두어 번 정도 자신만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세 번째를 내어주는 자존심 높은 주인장의 경계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란 소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문을 열고 얼굴을 드러낸 순간 선배라고도 할 수 있는 기존 단골들이 자신이 본인 자리에 지불한 시간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투박하게도 고고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리카르도는 그것이 좋아 꾸준히 오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위스키다.”
딱 네 자리 있는 바의 한 자리를 차지하자 그가 라벨이 다 벗겨져 이름을 도통 알아볼 수 없는 병을 내려놓았다. 주인장의 콧대 높은 성격 답게 음식은 손님이 고를 수 있어도 술은 고를 수 없어 가게엔 오늘의 술이라는 메뉴로 주종이 정해져 있다. 짧게는 사흘, 길게는 일주일마다 변동되는 술은 대체로 흔히 볼 수 없는 술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위스키란, 그가 결코 들여오지 않는 품목 중 하나였다. 리카르도의 짙은 눈썹이 한차례 들썩였으나 개의치 않고 뚜껑을 딴 그는 싱글몰트 잔의 삼 분지 일 즈음을 채워 밀어줄 뿐이었다. 잔을 끌어온 리카르도가 코끝에 대고 향을 맡는다. 수많은 브랜드가 뇌리를 스쳤지만 개중 어떤 것도 아닐 거란 확신이 더 무거웠다. 이제와 장난을 치는 건 아닐 텐데. 처음부터 군경 따위 마음에 안 들었고, 사실 이 날을 위한 인내였다는, 뭐 그정도의 조악한 서사라거나. 여러 숨결이 섞였을 노란 빛무리가 초록 눈 위로 내려앉는다. 일여 년 전 나름 심사숙고해 선물한 조명이 자신을 빤하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선물이라도 받으셨습니까······?”
“내가 샀을 거라곤 생각 안 하나?”
“그럴 리 없죠.”
가벼운 코웃음. 그는 철저하게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물론 많은 부분에서 타협해 적당히 추구하며 살아가고는 있다지만 누구에게나 12월의 장미가 있듯 그에게 있어 결코 뜻을 꺾지 않는 게 바로 술이었다. 제 나이보다 많은 세월을 가게에서 늙은 주인장이 흔하디흔한 술을 제 돈 주고 샀다면, 아마도, 내일 죽느냔 질문을 해야겠지. 그는 바에 놓여 있던 다른 잔에 같은 양의 위스키를 따르며 침묵한다. 본인 몫임에 분명했다. 이십 몇 년쯤 된 가게를 들락거린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가게의 주인이었다.
“마시자고. 설탕 대신 약 탄 음식 같은 맛이지만.”
그건 당최, 무슨 맛이란 말인가? 굳이 해괴망측한 비유를 하는 건 그의 수많은 특이점 중 하나였다. 문장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정보라곤 충격 받을 만큼 맛없다는 것뿐이었으므로 리카르도는 느리게 잔을 기울였고 떫은 방울이 혀끝에 닿아 퍼지기 시작한 순간 정말이지 순수하게 놀랐다. 이건 맛없다라는 말로도 부족한 수준으로, 그냥, 다른 세계의 맛이었다,
“누가.”
“음?”
“도전장을 줬네요······.”
가게에 내놓을 만큼 안전하다면 아무것도 타 있지 않았을 거란 점에서 더 악질적이다. 오로지 맛 하나로 널 암살해버리겠단 의미이니까. 이정도라면 어느 정도는 성공이라고, 리카르도는 메뉴판을 훑었다. 이 거리에서 가장 요리 잘 하는 사람의 음식으로 소독해야만 했다. 주인장의 폭소가 유리잔을 타고 미끄러졌다.
“조금 남겨주시죠~.”
“맛없다며, 왜?”
“나머지 두 놈 줄 겁니다.”
“고통은 나 혼자 느낄 수 없는 법이지.”
말마따나 죽마고우와 나누고 싶은 술을 살짝 밀어내며 리카르도는 오코노미야끼를 짚어 보였다. 이 요리는 주문하는 사람의 출신지에 따라 재료가 약간씩 바뀐다는 재밌는 점이 있었다. 주인장처럼 일본 혼혈인 조나단과 미국인 스카와 셋이 와서 주문했을 때 어느 쪽에 맞출지 고민하던 주인장이 일본 정석대로 해줘 조나단이 홀로 뿌듯해한 웃긴 일화도 있었다. 나란히 단골인 가게인 만큼 웬만해선 셋이 날 맞춰 오지만 이렇듯 휘황찬란한 밤에 질식할 뻔하다가 깨어나는 날이면 혼자 오고는 했다.
“요리는 서비스로 주지. 어머니와 술을 나눠 마셔준 기념이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으므로, 리카르도는 섣부른 발화 대신 침묵을 택한다. 그의 복잡한 가정사는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다. 딱 그가 알려준 만큼, 대부분의 손님과 비슷하게. 한 잔 더 줘, 이야기 좀 해보게! 미친놈, 네가 왜 내 엄마랑 이야길 해? 낄낄 웃는 소리 뒤로 가게의 세 번째 단골인 기계팔 파스터가 못말린다는 듯 웃고 있는 딸과 대화를 재기한다. 모두와 한 잔씩 했나보군. 그가 앞치마를 매고 버너에 불을 붙인다. 인력의 과반수가 로봇으로 대체됐음에도 거리 순찰은 인간이 해야 마음이 놓이는 모순의 시대의 또다른 모순이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과거를 끌어오는 기술도 발전한다. 언젠가 주인장은 그들 셋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 거리는 기꺼이 추억을 수리해 가며 살고 싶은 사람들의 터전이고, 불야성이 훤한 고층에 서식하는 이들은 기어이 미래를 곁으로 끌어내려 안전히 살고 싶은 사람들의 터전이라고. 바로 아래 후배 중 하나가 임무 중 팔 하나를 날려 먹고 기계로 대체하기로 결정한 날, 푸념도 다정하게 하는 스카에게 해준 말이었다. 후배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하겠다. 아이언 맨이 될 수 있는 건가요 따위의 말을 아직도 하고 있으니까. 리카르도는 턱을 괴고 좁은 주방을 오가는 주인장이 가진 고독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마저 숙련된 사람이다.
진흙에 범벅된 어린아이처럼 웃지만 누구보다 날카롭게 제련되어 그조차 일종의 가면인 사람. 기분이 좋은 날엔 자신들을 아이kid라고 부르고, 기분이 나쁜 날엔 오지 않은 단골까지 모조리 불러내 오늘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물은 뒤 대접해 주며, 이렇듯 평범한 날엔 대차다. 고작 열 테이블 남짓하여 협소하나 덕지덕지 붙은 인심과 온기로 언제나 만석이고, 세월의 때 묻지 않는 손님 없어 거리의 무엇보다 낡았지만 동시에 거리의 무엇보다 굳건한 방벽인 곳의 주인 다웠다. 번화가가 있으면 낙후 지역이 있고 인간이란 뭇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불행과 비교하며 더 낫다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종족인 만큼 외곽엔 슬럼가가 있다. 오랜 전쟁으로 가진 재화 대부분을 소진하고 지구의 주인이 다시금 자연 그 자체가 된 어느 시대, 없는 사람들은 죽어 스러졌으며 있는 사람들은 쓸 미래가 올 거란 광기 하나만으로 끌어안고 있던 금붙이 따위를 소비하기 위해서라도 작은 구역이나마 재건해 사회를 재차 일으키려던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회는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반증과 다름 없었다.
슬럼가 바깥은 황무지, 두텁고 거대하며 높디높은 방벽을 지나 중심가로 가까워질수록 오아시스로 둘러쌓인 이곳은 기형으로 구축된 인류 최전선. 2세대 정도의 과거 빈부격차보다 더 적나라하고 천박한 양분의 세계에서 이 거리는 타워라 일컬어지는 1구역과⎯실제로 안전을 이유로 슬럼가와 이름조차 없는 바깥을 감시하기 위한 탑 형태의 타워가 있기도 하다⎯다이크Dike라고 불리는 2구역 중에서도 타워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거리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무허가 가게를 내도 묵인해주는 것이었다. 타워 안은 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기술과 기계, 그것들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거주지로 이미 가득차 남는 땅이 없어 건물의 층을 가게로 사용하곤 하는데 정작 안쪽 사람들은 그런 거에 질려 바깥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이름 날리던 이들이 홀연히 사라졌다가 온전치 못한 밤에 녹아들어 다시 나타나는 곳이란 점도 있었다. 저쪽에서 딸과 식사 중인 마스터라거나, 구석자리에 구겨져 당근과 오이를 잔뜩 쌓아두고 먹는 엔지니어, 그리고 가게의 주인인 무기상 큰손의 적장자. 이들 모두 한때 타워 심처에서 기계를 만지거나, 기술을 개발해내거나, 황무지 정복을 위한 작업의 지휘관이었고 제발로 뛰쳐나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부든 여즉 심처에 남아 있는 권력자든 그들 입장에서도 도망자를 하나하나 단속하기 보다 적당히 풀어놓는 게 훗날 그들이 되돌아 오려 하거든 좋은 명분이 되므로 이 거리는 무법과 준법의 기싸움의 요충지가 된 것이다. 리카르도는 물로 입가심을 하며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손 빠른 주인장의 요리는 결코 십 분을 넘기지 않으니까.
“어머니는 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내놓으며 그가 산뜻한 어조로 말문을 튼다. 뿌옇게 물들었다가 가라앉는 안경을 벗어 한차례 닦고서 고쳐 쓴 리카르도는 조용히 식사를 시작할 뿐이다.
“주당가, 뭐, 주당가이기도 했다만 일종의 수집벽으로 좋아하셨지.”
“컬렉션이 어마어마했겠네요~···.”
“말해뭐해! 어머니는 그것들을 구경시켜주는 것만으로 평생을 놀고 먹었을 거야!”
“그정도였습니까······?”
한 잔씩 나눠주는 것도 아니고, 드물게나마 경매를 여는 것도 아니고 오직 관람비만으로 평생을 놀고 먹을 정도면 문화가 하나로 압축되기 이전부터 명품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그러니 담배와 술이 사치품이 된 문명 재건 시대부턴 더욱이 초호화가 됐겠지. 어찌 보면 둘 모두 과거의 산물이니 말이다. 향수nostalgia, 척박해진 사람들로 하여금 단 한 순간의 사치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게 하는 병이란 그런 것이므로.
“휘하의 부하들도 마다하고 자연스럽게 굴러떨어졌을 부와 명예도 내던지고 골든타임만 놓치지 않았으면 되살릴 수 있었던 눈도 버리며 이곳에 정착한 이유 또한 술이지.”
주인장의 음식은 늘 그렇듯 맛있고, 가게는 적당히 아늑하며 손님 저마다의 세계에 몰두하느라 선선히 소란한 현재, 제 나이보다 많은 시간을 이곳에 붙박여 있을 동안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한다는 건 무슨 징조인가. 위로와 공감에 앞서 진의를 파악하려 하는 자신이 너무 매정한 걸까. 하지만, 리카르도는 속으로 뇌까린다. 그 어떤 분노도, 고통도, 다정도 그에겐 도움되지 않을 텐데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저 자신처럼 삭이고 삭이다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오늘 비로소 소생했을 뿐이다. 불타는 폐허로부터 재가 되어 다시금 흩날릴 준비를 끝마쳤을 터였다. 이토록 오래 분해되어서야 출구에 다다를 수 있는 거라면 자신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다만 자조하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탄 실험에 휘말려 죽어버렸는데 본인 입지가 흔들릴까 무서워 은폐하고는 돈 될 것들은 죄다 고인의 뜻입네 하며 팔아버리면, 고분고분했던 착한 딸이라도 꼭지가 돌지 않겠어?”
과연 그가 그의 어머니 생전에도 고분고분했을지는, 전혀 공감되지 않지만 리카르도는 묵묵히 옅은 호응으로 듣고 있음을 알렸다. 턱을 쓸어내리는 그는 언뜻 어린아이에게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라도 들려주는 사람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가장 비싼 술 한 병 훔쳐 옆구리 끼고서 성치 않은 몸으로 냅다 그자의 사무실을 박살낸 뒤 뛰쳐나왔어.”
그 사고에 같이 휘말렸을 거란 추측은 너무나도 쉽다. 따라서, 그가 사령관이자 권력의 중심인 아버지보다도 어머니와 더 친했을 거란 사실 또한. 모든 비극은 우습게도 원시적으로 그로부터 시작된다. 애정, 동경, 사랑. 사람은 매 순간 저울질을 하는 존재이고 그의 저울에서 아버지란 작자는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워 협상조차 되지 않았을 게 뻔했다. 리카르도 자신의 저울엔 바로 자신이 올라가 있듯이.
“그랬는데 이렇게나 맛이 없어질 줄이야. 쯧, 역시 술도 타이밍이라니까. 좀더 일찍 깠어야 해! 전투기 한 대 값이 이딴 맛이라니!”
“전투기 한 대 값······.”
정말이냐고 되물을 것 없이 뒷편에서 야유가 쏟아진다. 아닌 척 듣고 있던 다른 이들이 보낸 반응이었다. 암만 그래도 술이 어떻게 전투기 한 대 값이야! 나이 먹더니 허풍만 늘었어, 쯧. 네놈이 술과 전쟁을 알어? 그러니까 그 두 개가 어떻게 나란히 있냔 말이야, 이사람아.
“하여튼!”
마침 그릇도 비었겠다, 주인장이 쏟아내기로 한 오늘치 할당도 끝난 것 같으니 이제 그만 귀가해야지 싶어진 리카르도가 자리에서 일어난 참이었다. 화폐가 더이상 통하지 않고 구 전선망이 가동 중지되며 생체 칩이라 불리는 새 시스템이 도입된 이래 각종 장신구가 유행해 리카르도는 반지 형태로 엄지에 끼고 다니곤 했다. 지불을 위한 홀로그램 너머로 주인장의 치솟은 입매가 유독 선명하다. 오늘 한껏 들은 건 제쪽인데 그는 어쩐지 제가 들었다는 양 하여 절로 의문이 드는 미소였다.
“오늘은 안 받는다니까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들었구만.”
“다음에 대신 얻어먹으려던 건데 말입니다~.”
“어림없지! 오늘치 운은 오늘 소진해 버리라고. 축적도, 이월도 되지 않거든.”
“오늘도 명언이십니다······.”
“그러니 마찬가지다. 사실 인간은 무엇도 내일로 가져갈 수 없어. 하루가 지나면 초기화되는데 미련한 머리가 그걸 기어이 붙잡고 있을 뿐이지.”
은은한 주황색 빛이 잠시간 숲에 머물렀다가 흩어진다. 대답을 고르지 못한 리카르도는 얼마간의 침묵 후 그럼, 수고하십시오, 인사 후 가게를 빠져나올 따름이었다. 덜컹, 문이 한차례 걸리고 드르륵, 두 번째에 열리면 차가운 밤공기가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든다. 세 번의 품을 들여야 하는 가게 앞에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 리카르도는 느릿 눈을 깜빡이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자정을 알려오는 소리가 거리에 나앉는다. 찔러오는 빛을 무시하며 리카르도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체한 건 아닌데도 명치께가 제법 무거워, 쉬이 잠 들 수 없을 듯했다.
씻고 나오자 시간은 어느덧 한 시였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며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 리카르도는 통유리 너머 징그러운 빛군단을 훑었다. 군경은 좁아터진 사회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최우선적으로 타워 사람들을 비호해야 한다. 하여 직업란에 한번 군경이 박힌 이상 누구도 타워 바깥에서 거주할 수 없었다. 군경 시험은 만18세 이상이라면 남녀노소 출신불문 누구나 응시할 수 있는 만큼 다이크 외곽과 빈민가에서도 합격자가 나오기에 파격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지만 그들도 정녕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빈민가나 황무지의 유령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키면 중심 빼곤 모조리 버리는 전략을 취하기 위함이란 사실을. 지옥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공평하므로 우리는 모두 무언가 하나씩 버린 사람들이었다. 다방면으로 문제가 참 많지. 헛웃음을 흘린다. 주인장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처럼 수많은 사람이 기술에 기대다 기술로 죽었다. 이곳은 하나의 거대한 공동묘지인 셈이었다. 그 위에서 누군들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까. 가끔은 죽었다는 사실보다 죽음의 이유가 더 고통스러울 떄가 있다.1) 건물은 의외로 자주 무너졌고 쉽게 재건됐다. 사령탑을 둘러싸고 있는 자잘한 빌딩 중 안 무너진 건물 따위 없었다. 그럼에도 대다수가 그곳에서 살고 싶어 한다. 때에 따라선 군경에게 할당되는 일정량을 자원 분배 실패 사례로 들고 일어나기도 할 만큼. 리카르도가 배정받은 빌딩은 입사 때 밝힌 의사에 따라 고작 2층짜리라 그들이 꿈꾸는 낙원과는 현저히 멀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 자도 있다. 피곤한 눈두덩을 꾹 누른다. 예상했던 대로 잠이 올 생각을 안 했다. 누구에게 정착해 과수면으로 괴롭히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한동안 소파에 늘어져 있던 리카르도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음 기계를 운용 중인 서재로 들어섰다.
어머니는 춤을 잘 췄다. 본업은 가수였으나 무대에 서는 순간 그는 그저 한 명의 지배자였다. 밤을 빼곡히 수놓은 불빛도 숨을 죽이고 관객들은 부드러운 압도감을 즐기며 온전히 무대 위에 집중하게끔 만드는 능력자. 리카르도는 그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꼭대기는 아니더라도 거진 맞먹는 고층에서 자동전구를 켜지 않아도 바깥의 불빛 덕에 낮처럼 환한 한밤 중 거실을 은은하게 감싼 재즈에 맞추어 그의 파트너로서 춤을 출 때면, 그리하여 곡이 끝나고 무대가 막을 내리며 가족들의 박수를 받을 때면 리카르도는 감히 자부하곤 했다. 자신의 행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토록 어여뻐 언제까지고 간직하고 싶은지. 리카르도는 가족을 진심으로 애정했고 딱 그만큼 아버지와 마찰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이 순간 같잖은 밤에 파묻힌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행복이 이렇게나 허상이라면 자신도 흩어져야 정상이건만 홀로 명료하게 현실에 매여 왜 이다지도 분노가 치미는가. 인간은 내일로 무엇도 가져갈 수 없다고? 그게, 숱한 고통에 담금질된 이의 고해이자 유언이라면 진실어어야 했다. 하지만 진실은 눈 먼 총알과도 같지. 그것에 관통당한 사람의 결말은 하나이다. 흉터가 생겼을지언정 살아가거나 회피하여 헛디뎌 굴러떨어지거나. 고이 모셔둔 LP판을 턴테이블 위로 올려 맞춘 후 바늘을 얹는다. 증강 현실 구현도가 한계점을 돌파해 유명 가수, 아이돌이 직접 찾아오는 서비스가 당연한 작금, 잡음 섞인 노래는 담배나 술보다 더 사치품이지만 리카르도에겐 진정한 의미의 사치품으로서 남아 있는 유품이었다.
I see trees of green······. 2)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리카르도는 춤을 출 줄 아는 사람이다. 배운대로, 그의 가르침대로, 그날 느꼈던 행복감대로. 빈 손과 마찬가지로 빈 품으로 의미 없는 스텝을 밟는다. 반토막 난 불야성이 과거를 입고 현재를 스쳐가는 자를 훔쳐본다. 그늘 무성한 숲은 빛마저 살라먹지만 때때로 변덕스레 새순을 피워내기도 하니, 또다른 무덤을 세우기란 요원하고 고통은 끈덕지므로 지긋지긋함에도 바라건대, 풍경이 재생될 동안은 살아 있고 싶었다. 말마따나 오늘의 바람이 내일로 이어지진 않으리라. 삶의 대부분을 내쉬는 숨, 들이마시는 공기, 자박거리는 발걸음 하나하나 인식하며 긴장으로 살아내겠지. 그러므로 리카르도는 다음 휴일에 다른 둘과 나란히 주인장을 찾아갈 테고 숨죽인 거리와 숨막히는 타워 사이를 황무지의 유령처럼 배회하겠지만 여느 때와 같이 리볼버를 내려둘 것이다. 딱 한 발 들어 있는 최후의 고백은 유언으로서 영원토록 자신과 함께할 터였다. 이윽고 노래가 멈춘다. 오래된 가수는 다시금 목소리를 잃고 잠에 든다. 리카르도는 판을 갈무리하고 보존된 하룻밤으로부터 빠져나와 바깥에서 현실을 재건한다. 여전히 밤이 밝았다. 별이 살해된 시대에 리카르도는 변명을 준비하는 대신 다음을 마련하기로 한다.
1) 천선란,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
2) Louis Armstrong, What A Wonderful Worl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