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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유실

리카르도가 어렸을 때 살았던 바닷가 마을은 지나치게 평화로운 곳이었다. 소년, 리카르도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나면 마을을 한 바퀴 걷곤 했다. 소담하게 지저귀는 새들, 컹컹대며 짖어대는 동네 떠돌이 개들. 몇 번인가 멀리 가지 말라며 나무라던 어머니는 마을이 소년에게 해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들의 일과를 방해하지 않았다.

타박타박, 샌들을 끌며 마을 주위를 돌아다니던 리카르도는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이 마을은 너무나 작아서, 열두 살이 될 때 동안 마을을 한 번도 벗어나지 않은 소년은 눈을 감고도 집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 이대로 다섯 걸음만 더 가면 농사를 짓는 두 명의 노인이 나온다. 그 노인들은 부부로, 리카르도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 마을에서 살았다고 했다. 허리에 힘을 들이지 않고도 밭을 가는 법을 아는 남편은 무릎걸음으로 풀을 베는 아내에게 자주 잘난 척 잔소리를 해댔다. 그러면 아내는 당신이나 잘 하슈, 하며 느릿느릿하게 무릎을 펴며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했다.

부부는 종종 집 앞을 스쳐 지나가는 리카르도에게 감자 따위를 건네주며 친근하게 대했다. 어디 노부부뿐일까. 소년이 동네를 훤히 아는 만큼 동네 또한 소년을 알았다. 여름이면 트럭에 포도를 한 움큼 싣고 나가는 와인 양조장의 주인도, 둥지에 떨어진 갓 태어난 참새를 가엾다며 데려온 꼬마 아이들도 언덕 위 별장 같은 집에 사는 예민한 소년을 알았다. 타인이 저를 아는 것은 퍽 달갑지 않은 일이었으나, 태어났을 때부터 이 마을에 살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리카르도는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희미한 오렌지 냄새를 맡았다. 조금 걸었다 싶었는데 어느새 오렌지가 자란 나무 앞까지 와 있었다. 다 쓰러져 가는 집, 우연히 자라난 오렌지 나무는 주인이 없어 동네를 오며 가며 돌아다니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나무였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 아침으로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걸 깨달은 리카르도는 잘 익은 오렌지 중 하나를 툭 딴 뒤 챙겨온 주머니칼로 서걱서걱 오렌지를 먹기 좋게 자르기 시작했다.

반으로 가른 과일을 다시 여덟 등분으로 자르자 입에 넣을 만한 크기가 되었다. 우물거리며 과일을 씹자 허기졌는지도 몰랐던 배가 조금씩 찼다. 근처 적당한 바위에 앉아 오렌지를 씹던 리카르도는 문득 불어온 바람에 섞인 풀 냄새를 맡았다. 앞머리를 슬슬 넘기며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주는 바람은 약간 습했지만 온화한 기분을 들게 했다. 그랬기에 소년은 여름바람을 맞으며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이 마을은 지나치게 평화롭다.

오렌지 하나에 이런 감상이 들기는 좀 후하다 싶지만, 리카르도는 슬슬 자라온 마을을 무료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열두 살의 소년이 가지기엔 다소 무거운 생각이었지만 또래에 비해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는 소년은 이른 사춘기가 온 차였다.

자라서 무언가를 꼭 이뤄내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지나친 열정은 갖고 싶은 생각도, 가질 생각도 없었다. 그렇지만 생활이 단조로우니 심심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좀 더 어릴 때야 어머니가 춤곡이니 바이올린이니 하는 것들을 가르쳐 주었기에 심심할 틈이 없었지만, 이토록 조용한 시골에 세련된 도시풍의 음악이 어울릴 턱이 없었다.

‘릭, 음악은 공기 중의 떨리는 잔향까지도 듣는 거란다. 숨 쉬는 소리, 무대 위의 공기, 더운 열기, 그리고 청중의 박수 소리가 합쳐지면 모두 무대가 되지. 언젠가 너도 그런 걸 느끼게 되면 좋겠다.’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는 시골에 내려와 요양을 할 정도로 몸이 약해져 있었다. 어머니가 가르쳐주는 것들을 모두 잠자코 들은 것은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리카르도는 엘피판이 틀어져 있는 어머니의 방에서 꽤 오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머니는 음악을 골라주며 말했었다.

‘이 구간은 파도가 치는 소리 같지. 모랫길이 밟히고, 물이 흐르는 소리가 음악에서 들린다는 게 신기하지 않니?’

바닷가에서 자랐지만 바다를 그리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바다를 닮은 클래식을 설명해 주던 어머니의 음성은 싫지 않았다. 어머니는 가만가만 첫째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당신이 좀 더 회복되면 도심으로 나갈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동생들을 낳을 수 있을 정도로 몸이 건강해지고, 리카르도가 열두 살이 될 때까지도 그의 가족은 시골을 벗어나지 못했다.

리카르도는 그것이 아버지의 ‘사정’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오랜만이구나, 릭. 어이쿠, 많이 컸는걸? 좀 더 크면 나보다도 더 크겠는데.’

한 달에 두어 번, 집에 찾아오는 아버지는 강인한 외모와 달리 가족에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가끔은 서늘한 눈빛을 하곤 해도 그의 눈빛은 어머니나 자신을 비롯한 자식들에게 닿으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리카르도는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그 비밀을 파고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건 아버지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언덕 위에 슬며시 걸려 있는 집을 보던 리카르도는 강한 볕에 녹안을 살풋 찡그렸다. 이쯤에서 집에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왕 산책을 나온 김에 조금 더 밖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돌아가면 네다섯 살 즈음의 동생들이 막 잠에서 깨어 어머니를 보채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정신이 없을 것이고, 보모는 그런 어머니를 보조하느라 정신이 없겠지.

고민하던 리카르도는 졸졸 떠내려오는 개울에 오렌지 향이 나는 손을 씻었다. 그리고는 마을 어귀 너른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역시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때아닌 농땡이를 피우기로 결심한 소년은 아예 바위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등을 대고 눕자 맑은 하늘 위로 구름이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좀 더 어렸을 때, 그러니까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동생들에게 좋은 형이자 오빠가 되어줄 거라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리 나쁜 형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동생들이 태어난 이후 리카르도가 겪어야 했던 성장통은 생각했던 것과는 영 다른 구석이 있었다.

‘오빠, 놀아줘!’

‘형, 나랑 같이 비행기 만들어주면 안 돼? 응?’

어머니가 동생들이 태어나면 심심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기에, 리카르도는 동생들이 자신을 이해해 줄 존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생각이었다. 갓 태어난 어린 동생들이 자신을 이해해줄 리가 없었는데. 갖고 놀던 장난감이나 값비싼 펜 따위를 동생들에게 쥐여주는 데에는 미련이 없었으나, 어머니와 단둘이었던 조용한 시간을 빼앗긴 건 살짝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리카르도는 눈꺼풀 위로 스쳐 지나가는 구름의 그림자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조용했다. 등 뒤로 닿은 바위가 시원했고, 근처에 있는 나무 냄새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이른 아침의 여린 햇살이 피부를 스치는 게 느껴졌다. 시골의 아침은 빠르다. 다만 농가로부터 꽤 멀어진 터였기에 한적한 바위 위에 누워 있는 시간은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나무는 언제든 리카르도에게 고향이었다. 숲이나 작은 동물들이 소리 없이 나다니는 오솔길을 떠올리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고향, 이라는 말에 바다가 뒤따르듯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부른 배를 안고 자신과 함께 모랫길을 걸었던 어머니를 잊을 수 없는 까닭일 것이다.

‘네 아버지는 내가 바다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곳에 터를 잡았지. 릭, 어떠니? 네 마음에도 드니?’

철썩, 푸른 파도가 어머니의 말에 화답하듯 밀려왔었다. 구름처럼 하얗고 몽실몽실해 보였던 포말. 리카르도는 옅은 포말이 갈라지고, 푸른 파도가 밀려드는 것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던 어머니를 기억했다. 그 미소는 지금도 변함이 없어서, 소년은 아버지가 어떠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가 조금 더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 비록 그 비밀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리카르도는 눈을 뜨고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비밀에 대해 생각했다. 아버지의 비밀은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작은 게 아닐 것이다. 자신을 비롯한 온 가족이 모두 시골에 내려와 살아야 할 만큼 가족들의 신변에 영향이 가는 일일 것이고, 그만큼 무겁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했기에 리카르도는 저 또한 아버지의 비밀을 안 뒤로도 부친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제가 감당하기에 큰 비밀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열네 살이 된 리카르도는 가족을 따라 수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를 하던 날, 어머니는 들떠 있었고 동생들은 조금 더 들떠 있었다. 그랬기에 갑작스러운 이사가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리카르도는 가족들을 따라 도시로 옮겨올 수밖에 없었다.

도착한 도심은 안락했던 시골과 달리 조금은 차갑고 서늘했다. 그러나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클래식을 들으며 자라온 소년은 컨트리풍의 음악이 흘러나오던 시골 대신 수업 때마다 클래식을 가르치는 도시의 학교에 익숙해졌고, 점차 또래들이 가십거리로 떠드는 패션이나 아이돌 따위의 화제에도 익숙해졌다.

아마 그대로 자랐다면 평범하고 멍청한 여느 십 대처럼 자랐을지도 모른다. 가족이 도시로 옮겨오게 된 연유를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아버지의 비밀을 끝끝내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아버지의 진짜 직업을 모른 채로 쭉 성장할 수 있었다면 어머니나 동생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만큼 온 마음을 다해 저도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리카르도는 부친에 대해 무지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기만이었다는 거, 아시죠?”

“릭.”

“이만큼 속여 왔으면 된 거 아닌가요? 저 이제 시골에서 처박혀 지냈던 어린애 아니에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뭐가 옳고 그른지 다 안다고요~. 그러니까….”

나를 멋대로 휘두르지 말라고. 리카르도는 그렇게 말했을 때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던 아버지를 기억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했던 걸 알았다. 삼 남매 중 장남이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가장 닮은 게 자신이었기 때문에. 예민하고 사나운 기질을 가져서, 때로는 아버지를 뛰어넘을 만큼 잔인해질 수도 있어서.

리카르도는 아버지를 닮은 사나움을 싫어했다.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누군가의 피로 물든 음식을 받아먹으며 살아왔다고 해도 또다시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어서 좋을 때가 있었다. 빌어먹게도 그때가 행복했을 때가 있어서. 그게 가끔은 미치도록 그리워져서. 그래서 그 사실이 죽을 만큼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시골에 처박아두실 거면 계속 처박아두시지…. 왜요, 눈앞에 두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까 봐 도시로 불러들이시는 게 마음이 더 편했습니까?”

“릭!”

“그냥 거기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는 그 말에 불같이 화를 냈다. 자신이 어떻게 저를 키웠는지 아느냐며, 생전 처음 보는 얼굴로 화를 냈다. 리카르도는 아버지의 분노 속에 상처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제가 만들었다는 사실도. 아버지를 피해 시위하듯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때에도 그 사실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시골에 살았던 때를 종종 떠올렸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였던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시골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구름이 흘러가는 것 따위만 보았던 게, 동생들이 이해자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애새끼 같은 생각만 했던 시절이.

그러나 또다시 한편으로는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고, 그의 비밀을 알고 나서도 아버지와 결혼했을 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르고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저를 보채는 동생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럼에도 가장 원망스러웠던 건 가족을 원망하면서도 애정을 놓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이 멸망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리카르도는 눈을 떴다. 깔고 누운 침낭이 서늘했다. 쉭, 쉭, 하는 소리가 숨을 내쉴 때마다 났다. 텐트 안에 설치해 놓은 공기 청정기 소리였다. 리카르도는 머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금 열린 텐트 틈으로 드문드문 모래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잠든 새 강한 바람에 텐트가 밀린 것 같았다.

리카르도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산소통에 잔량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텐트가 조금 열려 있는 걸 보았고, 텐트 안의 공기 청정기가 배터리가 거의 다 됐다는 걸 확인했다. 공기 청정기를 몇 번인가 건드려 보던 리카르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더 자긴 글렀군.

지익, 지퍼를 조금 열어 바깥을 본 리카르도는 주위 풍경을 샅샅이 훑었다. 날아가지 말라는 뜻으로 세워놓은 경계등이 저만치 밀려난 걸로 봐서 간밤에 거센 모래 폭풍이 분 것 같았다. 다행히 폭풍의 경로에 있지 않아 휘말리는 건 면했지만, 좀 더 머물렀다간 위험해질 게 뻔했다.

쉭, 쉭. 숨을 내쉴 때마다 산소마스크에 호흡이 차는 소리가 났다. 텐트를 정리하고 마스크를 다시 똑바로 고정한 리카르도는 제가 있던 흔적을 지우고 나아갈 경로를 가늠했다.

세상이 멸망한 지 십 년.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십 대였던 리카르도는 세상이 거센 모래 폭풍으로 말라 비틀어 가기 시작했을 때 전조 증상이 있었던 건물 붕괴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이 멸망할 때 즈음 가족들은 모두 죽었고, 리카르도는 홀로 살아남아 강화 신체 관리시설인 블랙배저에 들어가 강화 신체를 이식받았다.

차라리 가족과 함께 죽었더라면. 가족과 화해를 시도하고, 아버지가 더는 나쁜 일을 저지르지 못하게 노력했더라면. 그랬다면 홀로 살아남는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는 변하지 않았고, 가족들을 떠올릴 때마다 비릿하게 올라오는 죄책감도 여전했다. 그럼에도 이 진창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릭, 나는 네 아버지가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 그래도 이미 사랑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네 아버지를 홀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단다. 삶이란 그래. 역겨운 듯 보여도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게 삶이야. 그래서 나는 네 아버지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아.’

오랜만에 집에 들어갔을 때, 집에는 어머니만 있었다. 어머니는 다 큰 아들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눈물을 흘렸다. 엇나가는 아들이었고, 아버지의 비밀을 안 뒤로 한순간도 자랑스러운 아들인 적 없었지만 리카르도는 어머니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랑이 무거웠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도, 아버지를 온전하게 미워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모두 사랑이었기에. 그랬기에 리카르도는 어머니와의 마지막을 떠올릴 때마다 괴로워졌다. 그리고 가족들이 정말로 죽어버린 이후에는 좋았던 기억밖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릭, 내 작은 소르디.’

파도가 쳤던 날, 희미하게 모래가 날렸던 바닷길에서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도시로 옮겨온 뒤에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의미로 놀리듯 자신을 작은 소르디라고 불렀었다. 그러나 그 어린 날, 어머니가 저를 불렀던 음성에는 순수한 애정만이 담겨 있었다. 반짝이는 애정이었다. 그 애정을 받으며, 리카르도는 어째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녹아들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리카르도는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 뒤로 제가 잃어야 했던 것이 가족 간의 평화로운 관계만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의 순수했던 애정을 잃었고,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잃었으며, 가족을 향했던 끝없는 사랑을 잃어야 했다. 그 모든 걸 잃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했던 적도 있었지만 가족들이 죽고 난 후에는 가족들을 원망할 힘을 잃어버렸었다.

그것은 일종의 유실이었다. 원망할 대상을 잃어버린 분노는 세상을 멸망하게 한 모래 폭풍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으며, 스스로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그랬기에 리카르도는 매 순간 죽지 못해 살았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고, 유일하게 가족의 유품으로 남은 리볼버를 당기지 못한 채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제가 유실한 게 무엇인지 알았기에 리카르도는 도리어 삶을 선택했다. 그것만이 가족을 기억할 방법이었으므로.

방향을 가늠한 리카르도는 비틀대며 걸음을 떼었다. 잠을 별로 자지 못해 질질 끌리는 걸음이 무거웠다. 그럼에도 리카르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모래바람이 이는 희뿌연 세상으로, 느린 듯 천천히 한 걸음씩 걸음을 떼었다.

아마 그는 매 순간 삶을 선택한 걸 후회할 것이다. 그래도 나아가야 할 것이었다. 유실을 안고, 가족들에 대한 애정과 기억을 떠올리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리카르도는 부연 세상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걸음은 무겁지만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그는 나아갈 방향을 알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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