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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북대서양은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고 시시각각 날씨가 돌변하는 그야말로 황천(荒天)의 연속이다. 그날은 구축함이 해상 순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였다. 삽시간에 회색빛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백파를 일으키며 요동치기 시작하는 바다가 영 예사롭지 않았다. 곧 수심이 가늠되지 않는 검푸른 물이 함선의 갑판 위로 들이닥쳤다. 그때부터는 마치 도약한 고래가 다시 수면 위로 온몸을 내던지듯이 솟구치는 물보라 속에서 군함은 파도를 넘나들었다.

 

파도의 끄트머리에서 떨어지며 느껴지는 해방감은 곧 무거운 저항으로 바뀌어, 절로 오장육부를 뒤틀리게 했다. 해군에서 수없이 구르고 거친 파도를 뚫고 헤엄치는 베테랑 군인일지라도, 거대한 자연의 몸짓 한 번에 생리적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부대원들의 낯빛이 어두워져 가는 가운데 한 대원은 함교 밖으로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풍경에 압도되어 실성한 웃음을 흘렸다. 결국 임관된 지 겨우 3개월이 된 소위가 목 끝까지 들이찬 구토감을 참지 못해 죄송합니다, 라는 말만 남기고서 황급히 자리를 떴다. 거기서 그의 행동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위로서 벌써 몇 해를 보낸 리카르도 소르디는 이 모든 상황이 성가셨다. 어떤 때는 해적을 대응하는 임무보다도 골머리를 앓았다. 자연 앞에서는, 별 수도 없이 그저 바다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며 파도를 헤쳐나가야 했다. 함장과 항해장인 자신, 그리고 타를 잡은 부사관까지 세 사람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함선에서 요지부동 서서 황천 항해를 책임졌다.

 

“날씨가 많이 안 좋군.”

 

함장은 바깥 날씨와 무관한 사람인처럼 여상히 말했다.

 

“예~ 풍속 40노트에 파고 10미터는 족히 되어 보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폭풍을 겪었는지 얘깃거리로 쓰이지 않는 이상 무의미한 정보였다. 리카르도는 습관대로 보고했고 그의 상관도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창문에 하나둘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늘어나더니 바람에 날려 경쾌하게 창을 때려왔다. 태양을 가린 먹구름 아래로 한 겹의 구름이 더 몰려오자 이제 바다에는 완전한 어둠이 깔렸다. 그에 응하듯 더욱이 너울 치는 파도와 휘청이는 선체에 미처 고정하지 못한 서적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자신의 방은 볼 것도 없이 난장판이 되었으리라. 리카르도는 직감했다.

 

“소르디 대위, 함선에 방송 한번 하지.”

“예.”

 

잠깐 움직였을 뿐인데 속이 메슥거렸다. 신중히 발걸음을 옮긴 리카르도는 전원이 켜진 마이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툭 쳤다. 곧이어 함 내에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 승조원들은 개인 침실을 포함하여 함정 내 모든 장비를 단단히 고정하라.”

 

잔 속의 물이 찰랑인다. 리카르도가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인 잔을 중앙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행동을 멀뚱히 지켜보던 남자는 턱을 괴며 조용히 감상을 내놓았다.

 

“뱃사람 아니랄까 봐.”

“식겁을 했던 터라....”

 

불과 이 주 전에 맞닥뜨린 폭풍의 감각이 여즉 생생했다. 눈을 감고 고개를 가로저은 리카르도는 웨이터가 가져온 와인에게로 주의를 환기했다. 잔에 따라진 와인을 먼저 시음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웨이터는 정중하고도 숙련된 손길로 두 사람의 잔을 마저 채워주고 떠났다. 병에 붙은 라벨을 확인한 리카르도는 빙글 웃었다.

 

“그래~ 일은 할 만하고?”

 

마주 앉은 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본론을 꺼냈다.

 

“나, 승진했다.”

 

잔을 두어 번 돌리고 향을 음미하던 리카르도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값비싼 와인을 시킨 데에는 이유가 있다니까, 오랜만에 본 친구에게 그는 짓궂은 말로써 화답했다.

 

“양반은 못 되겠어~”

“좋은 말 좀 해 줘.”

 

스카는 씩 웃으며 와인 잔을 들어 보였다.

 

“버지니아까지 비행기 타고 왔는데.”

 

장교 후보생 학교에서 처음 만난 스카 오웬은 전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는 유망생이었다. 한 방에서 함께 지냈던 룸메이트로,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진 그는 동기들에게 늘 친근하게 다가갔어도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그런 그를 괜찮게 생각했고, 여러 훈련을 거치며 두 사람은 전우애를 다져갔다. 그리고 수료식을 앞두고서, 스카는 자진 퇴교를 결정했다.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이유였다. 모두가 아쉬워할 때 그는 미련 없이 마지막 정문을 나섰다. 그 후 본인의 대학 전공을 살려서 증권사의 트레이딩 부서로 입사한 그는 현재 뉴욕에서 근무하고 있다.

 

눈가를 꾹 누르며 졸음을 쫓는 스카의 눈이 퀭했다. 밤낮 없는 근무 탓이었는데, 회사 험담을 늘어놓으며 언젠가 퇴사할 거라며 다짐하는 그에게 리카르도는 비웃어주고 말았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친구를 살갑게 맞이하는 성정은 못 됐지만, 그와 과거 회포를 풀며 리카르도는 그 시절 치기 어린 20대의 자신을 반추했다. 실없는 이야기와 유치한 농담을 술잔 속에 하나둘 흘려보낸 두 사람은 앉은자리에서 와인 세 병을 비웠다. 웨이터가 또다시 정중하게 다가와 별문제는 없는지 물어볼 때 되어서야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스토랑을 나서자 쌀쌀히 불어오는 바람에는 겨울 내음이 났다. 한쪽 길가에 서서 담배를 빼어 물다가, 연기와 함께 따뜻한 입김을 불어내어 취기가 가시는 감각을 즐겼다. 그 꼴이 또 우스워서 두 사람은 한동안 비틀거리면서 웃어댔다.

 

“겨울이네.”

“겨울이지.”

 

돌아가는 비행 편까지 시간이 남아 스카가 잠시 리카르도 집에 들렀다. 눈을 붙이자마자 잠이 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갈 채비를 해야 했다. 스카는 소파에 눌러앉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출근해야 하는 현실을 한탄했다.

 

“내가 왜 일하러 가야 돼...?”

“이러다 늦겠어~”

 

리카르도가 비죽 웃으며 그에게 따뜻한 물 한 컵을 건넸다. 고마움을 표한 스카는 받아들인 컵을 꼭 감싸 쥐어서 차가운 손을 녹였다. 와인을 그리 마셔댔으니, 숙취가 심할 텐데 리카르도와 해장할 시간조차 없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스카는 미지근해진 물을 홀짝대며 중얼거렸다.

 

“오늘 점심은 햄버거다.”

“미국인이란....”

“너도 미국인, 앗, 뜨거.”

 

어느새 포트를 가져온 리카르도가 스카의 컵 위로 뜨거운 물을 부었다. 놓칠 뻔한 컵을 순발력으로 잡아낸 스카는 순간 울컥해서 리카르도를 노려봤다. 그러나 가늘게 휘어진 녹안과 마주한 그는 입을 다물었다. 괜한 말을 했다는 걸 인지한 스카는 얌전히, 뜨거운 물을 마셨다.

 

“릭, 몸 조심해. 뭐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고.”

“징그러운 소리 말고 얼른 가~”

 

스카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리카르도는 늦을세라 서둘러 걸어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현관문이 닫힌 집안은 바깥공기의 냉기만이 가득했다. 그새 사람이 왔다 갔다고 익숙했던 적적함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게으르게 소파에 기대앉은 그는 한참을 텅 빈 집을 바라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커튼 사이로 눈부시게 찔러오는 햇빛에 못 이겨 일어났을 때는 이미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리카르도는 두꺼운 가죽 재킷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식당 문에 달린 작은 종이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리카르도는 빈자리로 곧장 걸어가서 느른하게 앉았다. 이 가게의 주인장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그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서 주문했다.

 

“에스프레소 한 잔, 더블로.”

“술 냄새 한번 지독하다. 지독해, 요 녀석아”

얼굴을 찌푸린 중년의 여성이 손을 휘저으며 질색했다.

“와인을 좀 마셨지~....”

 

연이어지는 가게 주인의 잔소리에도 리카르도는 개의치 않고 능글맞게 받아쳤다. 그러자 혀를 크게 찬 주인은 앞치마를 한 번 추스른 뒤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리카르도는 익숙한 듯 테이블 위의 종이 신문을 펼쳤다. 1면에는 지중해 크루즈 여행 상품이 새로 출시되었다는 광고가 크게 실려 있었다. 광고 사진 속 풍경이 그의 눈에 익었다.

 

“여유만 있으면 크루즈 타고 호사나 누려보는 건데, 에구구.”

 

갓 뽑은 에스프레소 잔을 테이블에 올려준 가게 주인이 의자에 어정쩡하게 걸터앉아 팔걸이에 몸을 기대었다. 이를 주의 깊게 보던 리카르도가 신문을 반으로 접어 내려놓았다.

 

“여사님, 병원은 잘 다녀?”

“어이고, 이제 나한테도 쓴소리 하려고? 걱정 말아라. 잊지 않고 진료받으러 가고 있으니.”

 

걸을 수 없을 만큼 허리 통증이 심해진 그녀를, 리카르도가 병원에 데려갔었다. 의사를 소개받기 위해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아버지의 지인에게 전화를 걸 때는 다소 껄끄러웠어도. 리카르도는 어머니 모시듯 그녀를 챙겼다.

 

“날이 추워져서 몸이 굳은 게지”

 

간지러운 감정에 면역이 없는 그녀가 애꿎은 허리를 두드리다 이내 딴소리를 꺼냈다.

 

“가끔은 푸른 지중해 바다가 그리울 때가 있어. 늙어서 주책이라고. 쯧.”

 

윤슬이 일렁이는 선명한 바다. 어린 리카르도는 바다 수영을 즐겨했다. 바다가 아직 익숙지 않은 동생들은 짠 바닷물을 연신 뱉어냈고, 멀리 가지 말라며 타이르는 어머니는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는 가업을 잇지 않겠다는 자신에게....

 

탁. 눈앞에 그릇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놓였다. 덕분에 상념에서 깬 리카르도는 가만히 눈을 끔뻑였다. 그릇에 담긴 건 토마토 수프였다.

 

“다 큰 사내가 궁상은.”

 

금방 끓여 나온 토마토 수프 위로 김이 피어올랐다. 리카르도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도 식당을 차려볼까....”

 

들려오는 그녀의 타박을 뒤로하고 리카르도는 한 숟갈 뜬 수프를 입에 집어넣었다.

 

 

 

 

최근 서아프리카 연안에서 해적이 횡행하면서 리카르도가 근무하고 있는 버크 구축함이 대 해적 작전부대(CTF-140) 아래 배치되어 기니 만에 단기 파견을 나가게 됐다. 6개월간 집중적으로 해적 단속, 해상 훈련을 병행하는 고강도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다음 주면 귀항할 예정이었다. 고대했던 휴가가 다가오자 함정 안은 절제된 분위기 속 묘한 들뜸으로 뒤섞여 있었다.

 

항해 당직 교대가 이루어지는 자정, 함교로 올라온 중위는 늘 그랬듯이 군기 가득한 모습으로 경례 인사를 했다. 리카르도는 빈 종이컵을 입에 물고서 인수인계를 받고 있는 자신의 부사수를 지긋이 쳐다봤다. 잠을 설친 건지 평소와 다르게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고, 어딘가 정신이 팔려있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변화였다. 리카르도는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사수에게 입 모양으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중위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답했다.

 

“꿈자리가 사나웠어서... 별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위의 말은 파급이 컸다. 평소 그의 촉이 좋았기 때문인데, 크게 다칠 뻔한 부대원을 신통한 감으로 여러 번 구한 뒤로 함정 내 사람들은 그의 말을 꽤나 신뢰했다. 아주 작게 속삭인 문장을 귀신같이 알아들은 대원들은 침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혹여나 귀항이 늦춰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리카르도 또한 부사수의 예리한 직관을 높이 샀으나 어수선해지는 함교의 기강을 잡는 것이 먼저였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집중하지 그래~?"

 

그렇게 말했건만, 당직을 선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변은 일어났다. 날카롭게 튀는 마이크 소리와 함께 스피커에서 긴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원 주목! 해적 공격 발생! 전 승조원들 전투 위치로!”

“뭐야?”

“대체 어디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동요하기 시작한 대원들을 리카르도가 냉랭하게 꾸짖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러면 훈련을 받은 의미가 없잖아...?”

 

정적이 흐르고, 대원들은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훑어본 리카르도는 신속하게 상황을 정리하고대원들을 각 자리로 배치했다. 군 생활 동안 지휘, 통솔에 능력을 보였던 그가 나서자 함교는 금세 질서를 되찾았다. 리카르도는 중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잠시 조종 권한을 중위에게 넘긴다. 그동안 나는 전략실에 갔다오지.”

 

그리 말한 리카르도는 침착한 발걸음으로, 하지만 신속하게 함교를 벗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함장과 마주쳤다.

 

“함장님.”

“서둘러서 가지.”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고, 앞서는 함장의 뒤를 리카르도가 따랐다. 분주히 움직이던 사관과 장교들은 양쪽 벽에 붙어 서서 그들에게 예우를 차렸다. 두 사람은 그렇게 긴장감이 감도는 좁은 복도를, 엄숙한 얼굴을 한 군인들 사이로 스치듯 지나갔다.

 

“함장님 오셨습니다.”

 

전략실에서 대기 중이던 대원이 함장에게 종이와 펜을 건넸다. 함장은 그것을 받아 들고 곧바로 본부와 교신을 시작했다.

 

“CTF 140, 버크 호 함장입니다.”

 

“버크 호, 나는 맥스웰 제독이다. 미국 국적 상선이 동쪽 180해리 해상에서 해적 공격을 받고 있고 선장의 지시 하에 선원들은 시타델*로 대피했지만 1명의 선원이 실종되었다. 시타델이 아닌 다른 장소에 숨은 것으로 추정된다.”

*해적 습격 시 선원들의 긴급피난처

 

동쪽. 180해리. 1명 실종. 종이에 펜으로 휘갈긴 함장이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생계형 해적입니까?”

“보통은 그렇겠지, 하지만 그들의 무장 상태를 보면 선원들이 피랍될 위험이 충분히 있다. 신속히 이동해서 구출하도록.”

“알겠습니다.”

“추후에 연락하겠다. CTF 140, 아웃.”

 

송수화기를 내려놓은 함장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부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주조종실은 전력으로 기동 할 것을, 그리고 함교는 항로를 085도로 유지할 것을 명령했다. 좌표를 빠르게 받아 적은 리카르도가 잠시 후 함장에게 보고했다.

 

“전속력으로 간다면 6시간 소요, 도착예정시각은 06시 46분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함장이 리카르도를 보며 명령했다.

 

“자네는 함교로 올라가서 항해를 담당하지. 그리고 새 소식이 생기는 대로 보고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리카르도가 곧이어 물었다.

“실종된 선원의 신원이 어떻게 된답니까...?”

“18세 데크 수습생이라네.”

 

수습생이라면 배치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오직 구두로만 인수인계되는 시타델의 위치를 제대로 숙지 못했을 수 있다. 더군다나 긴급한 상황에서 침착하게 찾아가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리카르도는 부디 그가 해적들에게 발각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인생은 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본부와 계속 교신하던 소위가 함장에게로 달려와 소리쳤다.

 

“함장님! 상선에 화재가 났답니다!”

“뭐?” 함장은 보기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해적선에서 RPG*를 쐈는데 그게 연료 탱커를 맞혔는지, 배에 불이 붙었답니다. 해적은 그대로 도주했고 선원들은 퇴선 중에 있습니다.”                  *로켓추진유탄

 

“실종자 한 명은?” 리카르도가 다급히 물었다.

“그게, 아직 파악이 안 됩니다.”

“젠장....”

 

대원들이 저마다 탄식을 뱉었다. 순식간에 전략실 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기니 만은 수온이 높으니까, 바다에 무사히 뛰어들기만 했으면 버틸 수 있을 테지.”

함장은 대원들의 사기가 꺾이지 않도록 노련한 어조로 선언했다.

 

“우리는 오늘 선원 전원을 구출한다.”

 

결의에 찬 이들이 일제히 답했다. “예!”

 

탐조등의 불빛이 밤바다를 훑고 지나갔다. 함교로 복귀한 리카르도는 쌍안경을 들어 탐조등이 비추는 수역을 따라가며 퇴선한 선원들과 혹시 모를 익수자가 있는지 수색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람을 찾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함장의 말대로 적도 부근 연안이라 망정이지, 차디찬 겨울 바다에선 1시간만 지나도 생사가 불분명해진다. 저체온증이 아니라도 수색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해류에 떠밀려가고 종내에는 체력이 다하고 말 터이니, 그러니 시간이 관건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떠밀려오는 구명 뗏목 하나가 보였다. 그 안에서는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손과 몸을 흔들고 있었다. 부대원들은 신속하게 스피드 보트를 내려 그들을 구출해 냈다. 하지만 실종됐다던 수습생은 구명 뗏목 안 어디에도 없었다.

 

구축함은 실종자 한 명을 찾기 위해 본부가 지원해 준 헬기까지 동원하여 총전력을 기울였다. 몇 시간이고 갑판에 서서 밤바다를 샅샅이 살펴본 리카르도의 눈은 완벽히 어둠에 적응하여 떠다니는 쓰레기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수습생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면 수색이 수월할 텐데, 벌써 먼바다로 떠밀려 간 것일까? 아니면 불타는 배에서 아직도 탈출하지 못했다면?

 

“대위님.”

“저 떠다니는 물체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부사수인 중위였다. 입술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입을 꽉 다문 그는 처음부터 쌍안경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리카르도는 그런 부사수의 등을 가볍게 쳤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그렇지만....”

 

표정이 풀어지지 않는 중위를 보며 그는 픽 웃었다.

 

“뭐~ 네가 한 말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리카르도가 표정을 굳혔다.

 

“오만하네.... 네가 말한 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 같아?”

 

화난 듯한 사수의 목소리에 중위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뭐가 달라져?”

 

빠르게 쏘아붙인 리카르도가 잠시 숨을 멈췄다. 이렇게 말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답지 않게 감정이 격앙됐다. 한숨을 푹 쉰 그는 자신의 얼굴을 크게 쓸어내렸다. 가린 시야 속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중위가 느껴졌다. 한동안 이어진 두 사람의 어색한 침묵을 깬 건 뜻밖의 소식이었다.

 

“실종자 찾았습니다!”

 

부사관이 전해온 기쁜 소식에 리카르도는 입꼬리를 올렸고, 중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뒤이어 함장이 올라왔다. 즉시 차렷 자세로 거수경례를 한 세 사람에게 함장은 한 명씩 어깨를 토닥여주며 격려해 주었다. 끝으로 리카르도 앞에 선 함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자네 예전에 이탈리아에서 살았다고 했었나?”

“그랬습니다만....”

 

지난 2년간 봐온 함장은 사적인 대화를 잘하지 않는 자였다. 대뜸 고향 얘기를 꺼내는 그에게 리카르도는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함장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되려 그에게 의도를 알 수 없는 지시를 내렸다.

 

“소르디 대위는 의무실로 지금 좀 가주게.”

 

함교는 자기가 지키겠다며, 함장은 리카르도를 서둘러 내려보냈다. 리카르도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충실히 명령을 수행했다. 의무실 안에는 대원 몇 명이 함께 있었는데, 리카르도를 알아본 그들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리카르도는 몇 시간 동안 자신을 애태우게 한 당사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담요를 두르고 몸을 덜덜 떨고 있는 한 청년, 아직 얼굴에 어린 티가 나는 그에게 리카르도가 다가섰다. 처음엔 추위에 떠는 줄로 착각했건만, 그게 아니라 패닉이 온 것이다. 리카르도는 그제야 함장의 의도를 알아챘다. 넋이 나간 채 중얼거리는 청년은 이탈리아어로 말하고 있었다. 울음이 섞여 뚝뚝 끊기는 어절 속 엄마, 한 단어가 귀에 꽂혀왔다.

 

리카르도는 청년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수고했어. 이제 다 끝났어.”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운 환경 속에서 모국어가 들려오자 청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십니까?”

“거기서 살았거든~”

“이탈리아... 어디요?”

“시칠리아, 팔레르모”

“어? 저도요!”

 

선원 중에 유일한 이탈리아인이라더니, 리카르도도 같은 시칠리아 출신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동향인을 만난 것이 못내 기뻤던 청년이 그에게 이런저런 고향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리카르도는 청년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간간이 맞장구도 쳐주었다.

 

“두 분이서 무슨 대화를 하고 계신 겁니까?”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한 대원이 고개를 빼들며 궁금해 했다.

 

“나랑 고향이 같다네~....”

 

“오.”

 

청년은 전투복으로 무장하고서 순수한 반응을 보이는 군인들이 신기했다. 긴장이 풀린 그는 대원들에게 못다 한 감사 인사를 건네자 그들은 씩 웃으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전보다 안정을 되찾은 청년에게, 대원들은 공격을 받았을 때 어디에 숨었는지, 얼마나 오래 바다 위를 떠다녔는지 물었다. 그가 5시간이나 물속에 있었다고 답하자 환호가 일어났다. 청년의 머리칼을 헝클며 칭찬하는 그들 사이로 사병 하나가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아까 엄마는 왜 그렇게 찾은 거야?”

 

몇 시간 전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진 청년이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어머니가 위험하다고 꼭 항해사를 해야겠냐고 하셔서, 그걸로 싸우다가 바로 배 타러 갔거든요.”

“화해도 하지 않고?”

“...네.”

“어허.”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한 대원들 사이로 한순간에 죄인이 된 청년은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얹어놓고 조용히 그들의 말들을 경청했다. 팔짱을 끼고 내내 상황을 지켜보던 리카르도는 코웃음을 쳤다. 방금 전, 청년에게 장난쳤던 사병이 다시 그에게 물었다.

 

“이제 배 안 타겠네?”

 

해적을 만나고, 불타는 배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했으니, 일반 사람들은 겪어보지 못할 일이었다. 자칫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었다. 아마도 이 청년은 육지로 돌아가면 병원으로 연계되어 관련 상담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은 그들의 예상과는 다른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래도, 계속 탈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눈빛에는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주눅 들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청년의 당당한 태도에 몇몇은 호쾌하게 웃으며 좋아했고, 어떤 이는 어머니께 계속 불효하겠다는 의미냐며 짓궂게 반응했다. 리카르도는 오래전 아버지에게 큰소리를 치고 홧김에 집을 나섰던 자신을 떠올렸다. 어떤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마니까, 영영 화해하지 못하게 된 우리를, 리카르도는 줄곧 외면해왔다.

 

“돌아가면....”

 

하지만 천천히 가라앉는 배일지라도 돛을 올려야 한다. 언젠가 육지에 닿을 때까지, 끝까지 나아가야 한다.

 

“어머니 꼭 안아드려.”

 

청년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리카르도의 뒤쪽을 쳐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이제 해가 뜨려나 봅니다.”

 

수평선 너머로 여명이 터 오고 있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새로이 떠오르는 태양, 리카르도 소르디는 창을 활짝 열고 기꺼운 아침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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